위치 :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23
지정 : 충북기념물 제118호
배론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582M)의 봉우리가 둘러 산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고 불이어졌다. 이곳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나간 교우촌이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묘소
최양업 신부님은 성인이신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순교자인 이성례(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해인 1836년 3월,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 유학하였다. 10여년간의 수학 후 1849년 4월
15일(사백주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우리나라 두번째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해 12월 말경 귀국하여 12년간 쉴새없이 교우촌을 두루다니며
서민들과 부녀자들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며 민중의
사제로 살다가 1861년 6월 15일 사무 연락차 장주교께로 상경 도중
문경새재에서 병을 얻자 이 소식을 접한 푸르티에 신부가 병자 성사를
베풀자 선종하였다. 푸르티에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시신을 배론으로 모시고 와
신학당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 후 박해로 주인없는 무덤처럼 버려졌던 것을
1942년 무덤을 단장하여 묘비까지 마련되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세우지
못했다가 1945년 해방 후 그해 9월 27일에 이곳에 묘비가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다.
배론성지 둘러보기...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이곳에 온 황사영(알랙시오)이 토굴에 몸을 숨기고
어려움에 처한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소속 교구장인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백서를 썼다. 백서는 이 땅에 천주교회의 정착과
신앙의 자유를 실현시키기위한 일념으로 기도하듯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여
적어내려 갔다. 그 내용은 박해의 원인과 국내 정세 및 순교자들의 약력,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들을 청원하는 것이다. 백서는 13,384자나 되는
장문으로 가로62cm, 세로 38cm의 명주에 가는 모필로 써서 황심(토마스),
옥천회(요한)를 시켜 10월 동지사절단을 이용하여 북경에 보내려 하였으나,
황심이 붙잡힌 지 나흘 후인 9월 29일(음력)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백서도 함께 압수당했다. 황사영은 이 백서 사건으로 그해 10월 3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11월 5일 대역부도의 죄인이 되어 27세의 젊은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황사영 백서는 1894년 의금부 고문서
창고에서 발견되었고, 황사영이 쓴 백서 원본은 1925년 시복식 때에
MUtel 주교가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하여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성요셉 신학당
배론 성요셉 신학당은 메스뜨르(Maistre,이) 신부가 1855년 초 장주기(요셉)
회장이
내어놓은 그의 집을 이용하여 신학교를 설립하고 3명의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신학당이 시작 되었다. 1856년 8월에 베르뇌 주교로부터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10년간 가르친 푸르티에)Pourthie,甲) 신부와
1862년에 교수로 임명되어 5년간 가르친 프티니콜라(Petitnicolas,朴) 신부가
1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1865년에는 신학교에 소품자 1면,
삭발례자 1명, 신학반 2명, 그리고 약간명의 라틴어반 신학생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장주기(요셉),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 압송되면서 학생들은 흩어졌으며,
신학당은 폐쇄되었다. 하지만 이곳ㅇ느 신학교의 요람지이며, 국내 최초의
서구식 학교로서 의의를 가진다.
배론성지 게시판